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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차르

보통 러시아 마지막 황제에 대한 이야기는 아나스타샤 공주를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 작품은 완벽하게 니콜라이 2세와 그 가족들, 그리고 여기에 빠질 수 없는 라스푸틴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진행 중간중간 전문가의 코멘터리가 섞여 드라마와 다큐멘터리 중간쯤 느낌인 6부작 드라마.
아나스타샤와 그 남매들의 마지막에 대한 테마를 좋아해서 골랐었는데 내가 굳이 러시아 역사에 관심을 가질 일이 없었다보니 몰랐던 마지막 황제의 치떨리는 무능함만 감상하고(…) 끝났다.
복식이나 드라마 세트는 화려해서 눈은 즐거웠던 평작 정도.

다 보고 나니 그 뒤로 ‘니가 좋아할 거 같아’ 라며 띄우는 이름도 잘 읽히지 않는 추천작에 지옥에서 온 사자(…)같은 섬네일이 자꾸 떠서 저게 뭐래, 하고 무시했었는데

이 비주얼은… 너무… 내 취향 아님… (애니동 모 아저씨가 좋아할 것 같은 게 다 모여있네)

우연히 뜬 랜덤 섬네일에 프리다 칼로 비슷한 인물이 보여서 보기 시작했다.

비슷한 인물이 아니라 진짜 프리다 칼로였음…-_-; 트로츠키가 멕시코 망명 시절에 만났다고. 어디서 저렇게 닮은 배우를 구했을까.

화면도 화려하고 연출이 너무 좋아서 미드일 줄 알았더니 의외로 러시아 드라마.(보다보다 러시아 드라마까지 보게 될 줄이야 -_-)

사실 이 작품에서 가장 크게 남은 건 ‘연기를 잘하는 사람은 언어를 초월해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구나’ 하는 점이었다.
출연하는 대부분의 배우들(잠시 지나가는 조연들까지도) 어느 하나 연기의 구멍이 없었는데 무엇보다 젊은 시절부터 노년까지 모두 소화한 주연 배우 연기가 너무 훌륭해서 저도 모르게 드라마에 몰입했다. 찾아보니 트로츠키 역의 ‘콘스탄틴 하벤스키’는 실제로 현재 러시아에서 가장 인정받는 배우 중 한 명이라고.

8부작 안에서 ‘트로츠키’라는 사람의 일생을 담으려다보니 중요한 시점들만 짚어 풀어가서 모르는 사람은 보다보면 결국 당시 러시아 정세의 전체적인 흐름을 따로 찾아봐야 상황을 제대로 알 수 있으나 대신 트로츠키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는 수작이었고 다수의 행복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시작되는 ‘혁명’의 민낯—결국 실제로 고통받던 계층의 삶은 그다지 변하는 것 없이 그 ‘혁명’이 가진 자, 배운 자, 욕망을 가진 자들의 진흙탕 싸움으로 변질되어가는 과정에 대한 묘사를 보면 생각이 많아진다.

내가 우테나 이후로 누군가가 ‘세계의 혁명’에 대해 이렇게 부르짖는 작품을 또 보게 될 줄이야… -_-a

신이 그를 만들 때 두뇌와 능력에 모든 스탯을 몰아 찍어서 사회성과 나머지 분야에는 미처 분배할 것이 없었나 싶을 정도인(-_-) 이 인물은 ‘매력적인 듯 하지만 어딘가 확 마음이 가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아마 그가 결국 스탈린에게 밀려 망명길에 오른 것도 이런 부족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 드라마가 나왔을 때 트로츠키가 ‘미화’된 점에 불만인 사람도 많다는 모양이지만 그의 악행에 대한 생략은 많았을지 몰라도 그게 이 인물의 ‘미화’에 도움이 되지는 않았을 듯하다. -_-;

역사에서 ‘만약’만큼 부질없는 이야기가 없다지만 그가 유대인이 아니었으면, 혹은 좀더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평판을 얻는 사람이었으면 지금의 러시아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지기도 하는 재미있는 작품. 드라마 자체만으로 따져도 굉장히 공들여 만든 수작이라 한번쯤 볼만하다.

트로츠키까지 봤더니 다음은 또 다른 러시아 작품을 추천하는 AI…. 러시아 이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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